“ 세찬아....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돼보겠느냐...”

 

“예...? ”

 

이미 지난날의 미움과 함께 기억너머로 사라진 추억 한줌. 시야엔 의문스운듯 눈이 동그래진 어린 세찬의 얼굴과 그가 가져온 칼을 들어올리는 제 손이 보였다. 정교하게 백호의 무늬가 새겨진 칼집을 엄지손가락 끝으로 쓸어내렸다. 군사들의 표호처럼 웅웅거리는 바람이 제법 세찬 날이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칼집에서 나오자마자 바람에 몸을 맡기던 나뭇잎을 베어냈다.

 

“ 물론 그래도 너는 내 부하겠지만 ”

 

자만인지 농담인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어린동생이 마주치기엔 벅찼을 커다란 뜻을 숨긴 채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바보같고 순진한 아이는 여전히 농담인줄 아는 눈치로 같이 웃었던 것 같다.

“ 형님.. 방금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럼 두 번째잖아요.”

 

" 나 스스로 가장 높은 곳을 자처하진 않는다.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그래도 너에게 머리를 숙이긴 싫어. "

 

" 그게 뭐에요 대체... “

 

여전히 의미를 말해주지도 않고 빼꼼 입술을 내밀었다. “ 가끔 되게 유치하게 구시는 거 알아요?...” 세찬은 질린다는 듯이 그만 놀리라고 손을 휘저었다. 종국의 옆에 있던 시루떡을 대신 먹는 것은 덤이었다. 마침 날카로운 검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 칼집에 넣어졌다. 언뜻 복잡한 심정으로 그 명검을 보았던 것 같다.

 

“ 나중에 알게 되겠지.... 그리고 내 이 검으로 너를 죽이게 될 것이다... ”

.

.

.

 

종국은 눈을 떴다. 그는 잠결에 뒤척임도 없이 고히 이불을 덮고 이부자리에 누워있었다. 다만 심장은 조금 중구난방으로 흔들렸다. 꿈이었구나... 옛날의 추억이 왜 갑자기 되감기 되었는지 그리고 실제로 말한 적이 없던 마지막 한마디는 어찌 생생하게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이윽고 자리에 앉아 한숨을 푹 쉰 그는 자신의 목숨을 여러번 지켜준 백호의 검을 응시하였다. 세찬이 만들어준 그 검으로 정말 그를 죽일 날이 올까.... 제 목숨이든 남은 친구의 목숨이든 뭐든 사무친 배신감은 점점 더 지독해졌고, 지금 당장이라도 찾아가서 그 뜨거운 심장에 칼을 꽂아넣고 싶은 마음이야 충분했다. 하지만 버리지 못하는 그 검처럼 그의 발목을 잡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의 정체가 어린아이에게 남은 마지막 한줌의 정이라는 것을 느낄 때엔 웃음이라도 날 것 같았다. 지금에서야 정을 느낄 세가 있던가? 이내 종국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제 모든 것을 빼앗겼다. 평생을 바쳤던 명예와 권력도. 차곡차곡 모아둔 재산과 넉넉히 살만했던 집도, 호형호제하던 친우들도, 심지어 남자로써의 자존심까지 가져갔다. 그런 그에게 이제와서 무슨 좋은 감정이 남았다는 것일까. 남아있다고 해도 그것은 조각조각난 감정의 부스러기일 뿐이다. 도리어 종국은 입으려고 꺼내들었던 초록색 비단옷을 내동댕이쳤다. 대신 책상위에 올려진 손가락만한 작은 칼을 잡아챘다.

 

 

.

.

.

닭이 울기도 전인 이른 새벽. 환관한명이 종국의 몸을 구석구석 만지며 위험한 소지품은 없는지 확인하였다. 가슴에서 골반 다리까지 내려오는 손길에 종국을 침을 꿀꺽 삼켰다. 새벽이라 경계가 느슨하다고 해도 너무 성급했나..." 크흠.. ! " 허벅지 안쪽에 붕대로 묶어둔 단칼에 손이 닿을려고 할 때였다. 왕의 기침 소리가 들렸고 두 내시는 급히 하던일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문이 열리자 마자 어디선가 쪼르르 몰려온 궁녀셋이 왕이 입을 군룡포와 세수를 할 도구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물이 가득 담긴 통을 내려놓은 그녀들이 어느 때와 다름없이 쪼그리고 앉아 왕을 씻기려고 할 때, 흰옷을 입고 있는 세찬이 잠이 덜깬 얼굴로 손을 들었다.

 

“ 오늘은 사냥을 가야하니 옷은... 크흠.. 잠시 물러나 있거라. ”

 

그 와중에 거드름을 피우는 듯한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 종국은 고개를 숙여 왕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하였다. 뼛속에서부터 들끓는 경멸과 분노를 깊은 숨과 함께 누그러뜨린다. 하지만 그런 노고를 아는지 모르는지, 왕의 입에서 나오는 다음말은 퍽 의외의 것이어서 종국은 고개를 들 수 밖에 없었다.

 

“ 오늘은 김내관이 대신 해주면 좋겠구려. ”

 

“ 무엇을 ... ”

 

" 세수 말이다. 세수. "

 

종국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왕족은 귀하신 몸이니 직접 세수를 하지 않고 씻는 것까지 하나하나 아랫것들의 손을 받아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으나 그것은 후궁과 노예의 일이었다. 그런 허드렛일을 왜 갑자기 자신에게 시킨단 말인가... 물론 어릴적 늦잠을 자던 녀석을 깨워 빨리 일을 나가야한다며 세수를 시킨 일은 몇번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린아이의 투정같은 것은 아닐 것 아닌가. 오히려 지금의 종국은 세찬을 갑자기 공격해도 이상하지 않을 관계였다. 그렇다면 왜? ... 문득 다른 내신들 앞에서 자신에게 하찮은 일을 시키며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불쑥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종국은 이내 목소리에 감정이 들어가는 것을 꾹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 그것은 원래... 후궁들의 일이 아니옵니까? ”

 

“ 김내관 자네의 처지를 잊었는가.

설마 자네. 왕을 씻기는 영광스러운 일에 자존심이 상한 것은 아니겠지? ”

 

막 일어난 세찬은 턱을 괘고 다시 잠자리에 누운체 종국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숙여진 고개사이 빨개진 얼굴을 관찰하듯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정말 자신을 제 밑에 놓은 것이 즐거운건지... 한껏 의기양양해져선 장난이 섞인 목소리에 종국은 더욱 머리가 하얗게 타들어갔지만 고개를 더욱 조아리며 명을 받들 수 밖에 없었다.

 

“...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폐하. ”

 

그렇게 조심스럽게 다가간 종국은 두 무릎을 꿇은체 세찬의 앞에 앉았고 왕은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길게 내려오는 소매를 걷어 부치고 투명한 물을 한 손안에 고스란히 담은 뒤 다른 손으로는 세찬의 몸을 살짝 숙이게 하였다. 그러나 종국은 그 상태로 굳어버린냥 몇초간 망설였다. ‘야 이녀석아 대체 언제까지 잘거야. ’ ‘종국이형 살살해주세요 살살! ’ 어린 동생의 살집있는 뒷목을 부여잡고 거칠게 씻기던 옛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세 물방울이 손가락 사이로 뚝뚝 세어나가고 있었다.

 

“ 세수는 .... 오랜만이시지요. ”

 

" .... "

 

종국이 추억을 회상하듯 읊조린 말에 세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옛추억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마지막 애원을 하는 것은 자신일까... 종국은 헛웃음을 치고 둘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속삭였다.

 

“ 네가 정녕 나를 의심했다면 그날 나를 죽였어야했다. ”

 

그리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용안에 물을 튀기며 세수를 시작했다. 부드럽고 섬세하게. 얼굴 구석구석 닦아주는 손길에 살기를 감춘다. 너는 왜 나를 믿지 못했을까... 그날이후 몇 번이고 고민했던 답은 이제 악몽이 되어 그를 짓눌렀다. 세찬은 자신을 의심한 것이 아니다. 돌아온 답은 늘 같았다. 정말 의심을 했더라면, 정녕 그런 중죄라고 생각했더라면, 이토록 가깝게 두진 못했을 것이다. 그저 너를 친동생처럼 챙기고 아끼던 내가, 너에겐 한낱 눈엣가시였을 뿐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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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끝내려구 갑자기 사극에 빠져서 쓰고있지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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