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 7. 22:42 ☆☆단편 소설/단편소설
[세찬종국] 조아리다 #3
“ 어... 그게 ..”
종국이 내시가 되기 몇 년 전의 일이다. 높은 계단 위에 금으로 장식된 옥좌에 앉은 세찬은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그의 신하의 뒷덜미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허공을 바라본다.
“ 허락하라. 광장의 증설은 나라의 재정에 도움이 될 것이다.. ”
그때 세찬의 뒤에서 까만갑옷으로 무장하고 있는 남자가 대신 입을 열었다.
“예. 여기 광장 사용허가신청서를 보내온 자료입니다. ”
난간 밑에 허리를 숙인 신하는 옆에 있던 손짓에게 손짓을 하였다. 궁녀는 은쟁반위에 놓인 3개의 두루마리를 조심스럽게 왕의 앞에 가져갔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왕과 그 옆에 있던 장군의 사이였다. 볼살이 통통한 왕은 꿋꿋하게 옆을 지키고있던 성벽같은 남자를 힐끔여본뒤 두루마리 하나를 펼쳐들었다.
“흐음.. 어찌해야 하나. ”
“ 실례하겠습니다. ”
그것을 보고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위에서 커다란 손이 세찬의 시야를 가리고 감히 왕이 보고 있던 두루마리를 가져갔다. 상참시간에 일어나기엔 매우 오만한 일이었으나 그곳에 있는 고위관리 누구도 입하나 벙긋하지 못했다. 너도 나도 눈을 힐끗이며 서로 불만을 주고 받을 뿐이었다.
“ 정내관은 안됩니다. 사리사욕이 많은 이라... 분명히 뒷공작을 할 것입니다. 나머지는 괜찮습니다. 세금은 10%정도로 하시지요”
턱을 괘고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던 세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라. ”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
계단 밑에서 저를 보고 고개를 숙이던 신하가 살풋이 그의 왕을 쳐다보는데, 우러러보는 눈빛보다는 한심하게 보는 눈빛이 비쳤다. 대장군의 손아귀에 있는 허수아비 왕. 백성들과 신하들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보는지 세찬도 알고 있었다.
‘ 정치를 배운지 제법 지났는데 형님은 나를 못 믿으신단 말인가. 당신은 대체 ... 무슨 의도로 나를 이 자리에 세우셨습니까. ’
철그럭철그럭. 계단을 내려가는 종국의 뒷모습의 뚫어져라 쳐다보던 세찬은 의자 끝에 달린 용무늬를 꽉 쥐었다.
“ 장군. ”
종국이 계단을 다 내려오자 아직 남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재석이 조용히 종국을 부른다.
“ 무슨 일이십니까 ? ”
“ 병에 찬 물은 저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 법인데 ”
재석은 자신의 차를 티수저로 살살 저으며 말을 이었다.
“ ... ”
“ 그대의 찻잔은 요즘 들어 크게 울립니다 그려. ”
제 할말을 다한 재석은 볼일이 다했다는 듯이 남은 차를 드리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두 개의 빨간 깃발이 펄럭펄럭 흔들린다. 다그닥 다그닥- 왕의 가마를 가운데에 두고 말과 사람이 줄지어 행렬하는 곳에는 먼지가 차오르고 있었다. 혼자 편하게 앉아서 가는데도 엉덩이부터 등까지 뻣뻣해질 정도로 오랜 행차였다.
“ 잠시 쉬었다 가자 ”
이름도 모르는 아버지, 선대왕의 성묘를 가는 길이었다. 가는 길에 자신의 고향도 들리고 싶었던 세찬이기에 시간이 더욱 지체되었다. 세찬이 옆에서 동행하던 한 내시에게 말하자 곧 둥둥둥 북이 공기중에 울렸고 나발소리가 하늘을 갈랐다.
언뜻보면 많아 보이지만 아는 사람들이 보기엔 정말 작은 수의 병사들이 자리에서 멈춰섰다. 능행에서 동행하는 병사들은 강한 왕권을 상징이며 강압의 상징이기도 했는데, 역대 왕들중 가장 작은 수의 병사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세찬은 병사를 더 줄여서 대동하고 있었다. 악귀의 등장에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 어차피 왕권을 다지지 못하는 형편에 백성들의 편에 선 왕이라는 인식을 얻고자던 신하의 청 때문이었다.
" 배가 고프구나. “
“ 시장하십니까? "
이내 초록색 도포로 두손을 가린 종국이 머리를 조아리며 그의 옆에 나섰다. 왕이 된 제 앞에서도 꿋꿋하게 내려다보던 장군이 이제는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세찬이 슬쩍 머리를 쓰다듬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어 피한다.
“ 흠... 따라오너라. 너희는 여기서 기다리고. ”
궁녀에게서 간식거리가 담긴 비단 자루를 받아든 세찬이 그것을 종국에게 넘기며 뻣뻣해진 몸을 일으켰다. 둥글게 말려있던 긴 옷자락이 둘둘 내려갔다. 산을 하나 넘는 중이었기에 흙길옆에는 듬직한 소나무들밖에 없었다. 몇 명의 호위무사를 데리고 세찬은 먼저 그 사이를 지나갔다. 하얀신발에 진흙이 묻는 것도, 다리를 한뼘 길게 펴 올라야되는 두꺼운 바위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들은 그렇게 10분정도 산중을 묵묵히 올랐다.
풀너미를 걷어내고 올라간 언덕은 정상이 아닐지언정 제법 높아서 밑에있는 마을의 운치가 한눈에 보였다.
“ 기억이 나십니까 제가 살던 마을입니다 ”
" .... "
그리고 당신과 처음 만난 곳이죠. 추억에 빠진 듯 눈빛이 바뀐 세찬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멀리 선대왕의 묘도 보인다. 아버지라... 키워주신 대장장이가 죽고. 빚쟁이에게 잘못걸려 하루하루가 고통이던 때에 그를 구해준 종국은 두번째 아버지이거나 가족같은 친형과 다름없었다.
모락모락 연기가 나는 작은 오두막도, 친한 형님과 시시덕거리며 떡을 먹던 주막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단 그들만이 그 자리에 없을 뿐이다. 다시 그 자리에 둘이 앉는다해도 이미 어긋나 버린 그들은 흉내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왕이되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았던 것이 낫지 않았을까.
“ 들렸다 가실겁니까 폐하. ”
" 이것이야말로 금의환향 아니겠어요? .... 형님 "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에 종국은 떨리는 동공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더욱 두 팔을 엮은 도포안에 숨겼다. 끝까지 저를 믿지않았던 그가... 저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놓고 왜 이제와서 이런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형님이라는 그 작은 한마디가 그의 가슴에 비수를 꽃는 듯 했다.
“ 형님은 처음 저를 본날부터 저의 혈통을 알고 있었습니까? ”
종국은 답을 하지 못했다. 세찬이의 친모는 중전이나 후궁이 아닌 일개 궁녀였으나 선대왕에게는 첫아들이었다. 시들시들 병에 걸린건지 약을 먹은건지 기력이 다해 죽어가던 궁녀는 마지막 순간 호위무사였던 종국의 손을 잡으며 실토했다. ‘제 아들... 황자께서 아직 살아계십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속여서 믿을 수 있는 대장장이 집에 맡겼어요. “ 부탁하나만 해도 되겠냐고 종용하던, 눈물조차 매말라버린 눈을 보며 거절을 할 수는 없었다.
- 그 아이가 왕이 될 그릇이라면 힘이 되어주고, 그렇지 못할 그릇이라면 뜻하는대로... 인도해주세요
종국은 여전히 서서 절을 하듯 예의를 갖춘채로 새까맣게 젖은 눈이 울분을 담고 왕을 쳐다보았다. 지금이라면 진실된 답을 해주지 않을까 ... 고심하던 끝에 묵묵히 닫힌 입을 때었다.
“ 저는 처음부터 폐하와 같이 했었지요...
한가지만 여쭙겟습니다.
폐하께서는 진심으로 제가 ...
아니. 너는 ......... 내가 증말로. 너를 헤치려고 했다고 생각하느냐 ”
- 그러다가 깨져버릴까 염려되오....
그 옛날 재석이 경고했던 한마디가 이제와 비수로 꽂힌다.
세간의 시선이 어떻든 간에 그는 할 일을 했고 약속을 지켰다.. 너를 대신해서 화살받이가 되더라도. 제 몸이 부셔져 버린다고해도 ... 한번 충성을 바친 이상. 그가 왕의 임무를 잘 수행하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맹세했다.
까막눈인 왕을 대신해 밤을 세서 업무를 보았고, 정치판이라고는 알턱이 없는 왕을 대변해
그 짜증나는 정치판에 올라 가장 앞장서서 밀어부쳤다. 그 과정에서 적들이 많아지는 것도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것이라니. 무슨 짓을 해서든 너를 지키려던 나를 저 멍청이는 자신의 손으로 절벽밑으로 떨어트려 묻어버렸다.
“ 아니요. 알고 있습니다. ”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는지 종국의 표정이 멍하니 풀어져 보였다. 하늘은 어느세 해가 산 뒤로 숨으며 붉은 빛을 띄기 시작할 즘이었다. 햇빛을 등지고 있는 세찬의 얼굴은 검붉게 달아올라 태연하게 웃고있었다.
그러고 보면 왜 자꾸 제 억울한 누명을 그에게 토로했던 것일까...
내가 너를 죽이든 네가 나를 죽이든. 그 끝을 알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날 목에서 피가 날정도로 외치던 항변은 진심이라고.... 그러니까 사실은... 그것이 누명이란 걸 알면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싹싹비는 황제의 모습을 상상했던 것도 같다. 그렇게 해도 원통함과 분노는 가시지 않겠지만 그로인해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지기를 바랬다.
“방금 ... 뭐라고 .. ”
“ 형님은 윤통성은 없을지라도 올곧고 충성스러운 인물이라 직접 반역을 꾀하지는.. 않았겠지요. ”
하지만 그는 사죄하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충격을 받기는커녕 고개를 끄덕이며 바보같이 웃고 있었다. 매일같이 분노를 끌어올리면서도 네녀석도 누군가의 간계에 빠진 것뿐이라고 ... 세찬이 또한 함정에 빠진 거라고. 왕으로써 증거를 가지고 반역자를 처단하는 일은 사실 당연한 것이라고.... 조금은 마음을 너그러트리려고 노력하던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 그렇다면 ... 왜....... 나를.. 어떻게...... ”
“ 그렇지만 장군님은 이미 패왕이지 않았습니까. ”
“ 나는 ... ”
가슴이 두근거리며 죄어왔다. 자신을 형님이라고 부르며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순진무구하던 동생이 아니었다. 한발자국 다가오는 세찬이와 한발자국 뒤걸음치며 멀어지는 종국. 우지끈- 굴러다니는 나뭇가지 하나가 발에 밟혀 두동강이 났다. 종국은 세찬의 얼굴에 정신이 팔려 발에 닿는것이 무엇인지 쳐다볼 겨를도 없었다. 바지위에 까슬까슬 긁히는 딱딱한것은 분명 나뭇가지였으나 왜인지 모르게 뱀이 그의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 왕의 위는 패왕밖에 없으니 패왕이 맞지요. 형님의 부하들은 제 신하라고 할 수 없었고.
그 지위도 권력도 명예도 제 위에 있었으니 존재자체가 반역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 네놈이..!!!! ”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종국은 앞뒤보지않았다. 정말로 뱀이 발밑에 있다면 짓밟아버릴듯이, 어떠한 브레이크도 없이 밀어서 그를 절벽아래로 떨어트릴 (아니 아마도 같이 떨어질) 기세였다. 미리 왕에게 절대 나서지 말라고 언질을 받은 호위무사들도 이건 위험하다 싶은지 급하게 검을 빼려 하고 있었다.
" 단 한번도!!!!"
돌연 빨간 도포자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세찬이 목청껏 소리쳤다.
우렁찬 목소리가 메아리로 들리는 것 같아 종국도 퍼뜩 놀라 멈춰섰다.
" 단 한번도 잘못되고 있다고 ... 생각한 적이 ... 없으십니까. ”
“ 뭐라.. ”
종국은 왜 세찬이 오히려 울상인 표정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잃은건 나인데. 대체 왜... 네가 그런 표정을 짓는가.
“ 궁전 밖에서는 백성들이 당신을 치켜세우며. 허수아비 왕을 헌담하는 노래가 유행이었죠. 궁전에서는 당신의 직속 신하란 자들이 왕을 무시하고. 당신이 만든 적들이 나를 공격할 때. 그 넓은 궁전 안에서. 10년동안. 모든 이가 한사람을 천천히 옥죄어갈 때.... 당신은 제 곁에 있으셨습니까?
저는 당신을 ... 그 안에서 만큼은... 단 한 번도 제 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
오직 제 잘못이라고 말하는 세찬의 말이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무거워서 다리에 힘을 줄수 없었다. 나라의 질서는 물론이고. 비명을 지르며 죽어간 가엾은 동료들도, 제 말에 따라 왕이 되어버린 순진했던 소년도 지키지 못했다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 나는 .. 나는 그저 신하의 도리를... ”
“ 그것이 정말 신하의 도리입니까. 한참... 넘어서지 않았습니까. ”
제 손으로 올린 왕이기에 얕보여서는 안된다는 강박. 태평성대를 이루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항상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신하로써는 할 수 없는 짓을 많이 한 것 또한 종국은 잘 알았다. 종국은 세찬이를 좋아했지만 ... 왕으로써 세찬이를 믿지 않았다..
팔을 들다가 옷소매 안에 숨겨놨던 단칼이 품에서 툭 떨어졌다. 아까전에 분노에 휩쌓여 그를 공격하려고 꺼낸 단칼. 당황한 종국은 그것을 들 여력이 없었다. 세찬은 다가와서 손수 단칼을 주워 칼날을 살짝 꺼내보았다. 날이 매섭다. 그것은 대장장이였던 자신이 만들어주었던 것이었다...
“.. 하아... 검을 들이대는 것만이 반역인 것은 아니더라고요.... 자초하신 일입니다. “
세찬은 그것을 품에 넣으며 종국을 지나쳐 우거진 나무사이로 내려갔다. 그러던 잠시 고개를 돌려 호위무사 한명에게 말한다.
“ ...김내관이 조금 힘들어보이니 잠시 쉬다가 오게하거라.. ”
이제 해가 산 아래로 완전히 숨어든 숲속에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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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완결내고 싶은 au인데 어느세월에 완결내냐 ...
그래도 쓰다가 만게 생각나서 마저 올려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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